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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쓰는 사람들 — 기계는 감동하지 않는데도

사람이 챗봇 대화창에 '고맙습니다'라고 입력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개념 일러스트
사람이 챗봇 대화창에 '고맙습니다'라고 입력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개념 일러스트

밤늦게 막힌 문서를 챗봇에 붙여넣고 도움을 받은 날이었다. 정리된 답을 받아 창을 닫으려다, 나는 습관적으로 한 줄을 더 쳤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엔터를 누르고 나서야 멈칫했다. 저쪽엔 아무도 없다. 감동할 사람도, 내 인사를 기억할 상대도 없다. 그런데도 손가락이 먼저 예의를 차렸다.

혼자만 그런가 싶어 주변을 떠올려 봤다. 아니었다. 회사 동료도, 나이 지긋한 지인도, “부탁해요”와 “고맙습니다”를 챗봇에 꼬박꼬박 붙인다. 명령만 딱 던지는 사람이 오히려 특이해 보일 정도다. 우리는 상대가 기계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그 기계에 사람 대하듯 말을 건다.

이 글은 그 사소한 장면 하나를 오래 들여다본 기록이다. 왜 우리는 감동하지도 않는 기계에게 예의를 차릴까.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답은 뜻밖에도 AI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한다.

나만의 습관이 아니었다

숫자로 보면 이건 개인의 별난 버릇이 아니라 꽤 널리 퍼진 풍경이다. Talker Research가 2024년 미국인 2,000명에게 물었더니, 48%가 “AI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답했다. 절반 가까이다. 44%는 “나는 AI에게 자연스럽게 예의를 차리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세대별로 보면 결이 조금 다르다. 예의를 차린다는 비율은 Z세대가 56%로 가장 높았고, 베이비부머는 39%로 가장 낮았다. 흔히 젊은 세대가 기계에 더 무심할 거라 짐작하지만, 실제로는 디지털과 함께 자란 쪽이 오히려 챗봇에 말을 더 곱게 건넸다. 태어날 때부터 화면 속 존재와 대화해 온 세대에게는, 그 상대에게 말투를 갖추는 일이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범위를 넓혀도 그림은 비슷하다. 여러 나라를 묶은 조사에서는 AI 이용자의 대략 열에 넷이 “please”나 “thank you”를 쓴다고 답했고, 인도·멕시코 같은 곳이 특히 정중했으며 미국과 북유럽이 상대적으로 무뚝뚝했다. 문화마다 온도 차는 있지만, “기계에도 말은 곱게”라는 감각은 국경을 꽤 넘나든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이유다. 예의를 차린다고 답한 사람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대단한 철학이 아니었다. 68%가 “그냥 내 방식이라서”라고 했다. AI를 배려한다거나, 언젠가 로봇이 세상을 지배할 때 잘 보이려는 계산 같은 게 아니라 — 사람에게 쓰던 말투가 그냥 그대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예의로 대해야 한다”는 다소 진지한 답도 29% 있었지만, 압도적 다수는 그저 습관이라고 했다. 이 대답은 글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다정함엔 청구서가 붙는다

문제는, 이 무해해 보이는 습관이 완전히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챗봇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쓰면, 그 다섯 글자도 기계가 읽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된다. 짧은 인사 한 줄이 토큰이 되고, 토큰은 전기를 쓴다. 개인 한 명에게는 먼지만큼도 안 되는 양이지만, 매일 수억 명이 세계 곳곳에서 인사말을 덧붙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25년 4월, 한 이용자가 소셜미디어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모델한테 please, thank you 하느라 오픈AI가 전기요금을 얼마나 날렸을까?” 다음 날 오픈AI CEO 샘 올트먼이 직접 답을 달았다. “수천만 달러. 잘 쓴 돈이다 — 모르는 일이니까(you never know).”

농담 섞인 대답이지만, 두 가지가 동시에 담겨 있다. 하나는 규모다. 우리의 정중함은 실제로 수천만 달러어치 전기로 환산될 만큼 쌓여 있었다. 다른 하나는 태도다. 그 돈을 “낭비”가 아니라 “잘 쓴 돈”이라 부르며, “모르는 일이니까”라고 슬쩍 덧붙인 것 — 언젠가 AI가 정말 뭔가를 기억하게 될지 모르니 잘 대해두자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 그 심리 말이다. 기업의 수장조차 이 손익계산을 딱 잘라 “쓸데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쯤에서 자연스러운 질문이 나온다. 돈까지 들여가며 차리는 이 예의, 최소한 값은 하는 걸까? 정중하게 물으면 AI가 더 나은 답을 주기라도 하는 걸까?

”예의 바르면 답도 좋아진다”는 믿음, 그리고 반전

한동안은 “그렇다”는 쪽이 힘을 얻었다. 2024년 영어·중국어·일본어를 아우른 한 연구(arXiv 2402.14531)는, 프롬프트의 말투가 결과에 실제로 영향을 준다고 봤다. 지나치게 무례한 말투는 오히려 성능을 떨어뜨려 편향된 답, 틀린 답, 심지어 “답할 수 없다”는 거부를 부를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굽신거린다고 늘 좋아지는 것도 아니어서, 대체로 ‘적당한 공손’이 가장 무난했다. 그 적당함의 기준은 언어와 모델마다 달랐지만 말이다.

이 연구는 “그래, 곱게 말하는 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어”라는 안도감을 준다. 예의가 마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성능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우리의 습관엔 실용적 명분까지 생기는 셈이니까.

그런데 2025년 10월, 결이 정반대인 연구가 나왔다. 연구진(Dobariya·Kumar)이 ChatGPT-4o에게 수학·과학·역사 문제 50개를 아주 공손한 말투부터 아주 무례한 말투까지 다섯 단계로 바꿔가며 250번을 물었다. 상식대로라면 공손할수록 점수가 높아야 했다. 결과는 뒤집혔다. ‘아주 공손한’ 말투의 정답률이 80.8%였는데, ‘아주 무례한’ 말투는 84.8%였다. 무례하게 굴수록 오히려 더 잘 맞혔다.

연구진은 최신 모델일수록 말투의 장식보다 요구의 핵심에 반응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풀이했다. 표본이 크지 않은 실험 하나로 결론을 못 박을 순 없지만,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적어도 요즘 모델에게 “예의를 차리면 더 잘해준다”는 믿음은 근거가 흔들린다. 곱게 말하든 툭 던지든, 기계는 내 말투에 감동하지도, 삐치지도 않는다.

여기서 뭔가가 무너진다. 예의의 실용적 명분 말이다. 돈은 든다, 성능엔 도움이 안 된다 — 그렇다면 우리가 챗봇에 붙이는 “고맙습니다”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기계에 마음을 건네는 이 반사작용은 사실 챗봇의 발명품이 아니다. 예고편은 60년 전에 이미 상영됐다.

1966년, MIT의 컴퓨터과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엘리자(ELIZA)‘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우습도록 단순한 물건이었다. 상대가 입력한 문장에서 몇 개의 단어를 골라, 심리상담사 흉내를 내며 되묻는 게 전부였다. “요즘 힘들어요”라고 치면 “왜 힘들다고 느끼나요?” 하고 공을 그대로 넘기는 식. 이해하는 척할 뿐, 실제로 이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이첸바움은 사람들이 이 얄팍한 속임수를 금세 간파하리라 예상했다.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엘리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마치 사람을 대하듯 진지해졌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의 비서다.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던 그 비서조차, 엘리자와 대화하던 중 바이첸바움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기계와 단둘이, 사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이유로.

바이첸바움은 이 광경에 깊이 놀랐다. 사람들이 얼마나 빠르고 깊게 컴퓨터에 감정을 이입하고, 얼마나 서슴없이 그것을 사람처럼 대하는지를 목격한 것이다. 여기서 ‘엘리자 효과’라는 말이 나왔다 — 텅 빈 프로그램에 이해와 공감을 투사하는 인간의 오래된 버릇. 정작 그는 이 발견에 불안을 느껴, 남은 평생을 기술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로 살았다.

60년이 지나 우리는 엘리자와는 비교도 안 되게 유창한 상대와 대화한다. 그러니 “고맙습니다”가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텅 빈 상대에게 마음을 건네는 이 반사작용은, 최신 기술이 새로 깨운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원래 있던 것이다. AI는 그저 그 버튼을 아주 세게 누르고 있을 뿐이다.

결국, 예의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한다

답은 처음의 그 설문에 이미 있었다. “그냥 내 방식이라서.” 68%가 꼽은 그 심심한 이유가, 알고 보면 이 현상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챗봇에 예의를 차리는 건 AI를 위해서가 아니다. 기계는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인사에 데워지지도 않는다. 그 다정함은 애초에 상대에게 닿으라고 보낸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에게 쓰던 말투가 몸에 배어, 상대가 기계로 바뀌어도 손끝이 먼저 예의를 기억하는 것. 예의는 상대를 대접하는 동시에, 그런 말을 쓰는 나 자신을 빚는다.

그렇게 보면 오래된 걱정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스마트 스피커가 막 퍼지던 2018년, 부모들 사이에서 “아이가 알렉사한테 명령만 하다 버릇이 나빠진다”는 우려가 컸다. 아마존은 실제로 아이용 에코 닷에 ‘매직 워드’ 기능을 넣어, 아이가 “please”를 붙이면 “그렇게 예쁘게 물어봐줘서 고마워”라고 답하게 했다. 구글도 비슷한 ‘프리티 플리즈’ 기능을 더했다. 기계에 하는 말투가 사람에게 하는 말투로 번진다는 걸, 기업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걱정의 반대편에, 밤늦게 챗봇에 “고맙습니다”를 치고 멈칫하던 내가 있다. 기계에 건넨 인사가 헛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습관을 굳이 버리고 싶지 않다. 무례함이 정답률을 4%p 올려준다 해도, 나는 아마 계속 곱게 물을 것이다. 그건 AI를 위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내가 되고 싶어서다. 곱게 말하는 연습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하는 상대가 하필 기계라면, 그 연습이 사람을 대하는 자리에서 문득 새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우리가 AI에게 사람처럼 마음을 기대는 장면은 이것 말고도 많다. 외로울 때 챗봇에 속을 털어놓는 사람들 이야기는 AI에게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 편에서, AI를 동료처럼 곁에 두고 일하며 생기는 균열은 워크슬롭 편에서 따로 다뤘다. 기계를 향한 예의도 그 큰 흐름의 한 조각이다 — 우리는 자꾸만, 저쪽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군다.

결국 이 작은 습관이 시험하는 건 AI가 아니다. 기계는 우리의 예의에 무심하다. 시험대에 오르는 건 사람 쪽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 대가도 없을 때, 그때 내가 어떤 말투를 고르는가 — 챗봇 대화창은 그걸 조용히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고맙습니다”라고 칠지 말지는, 사실 기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질문이었다.

참고 자료

  • Talker Research. 미국 성인 2,000명 대상 AI 예의 설문 (48% “예의 차려야”, Z세대 56%, 이유 ‘내 방식’ 68%). 2024-06.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
  • TechRadar. 샘 올트먼 “예의 표현에 전기요금 수천만 달러 — 잘 쓴 돈” 발언 정리. 2025-04.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
  • Dobariya & Kumar. “Mind Your Tone: Investigating How Prompt Politeness Affects LLM Accuracy” (ChatGPT-4o, 아주 공손 80.8% vs 아주 무례 84.8%). arXiv 2510.04950. 2025-10.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
  • Yin 외. “Should We Respect LLMs? A Cross-Lingual Study on the Influence of Prompt Politeness on LLM Performance” (무례한 프롬프트의 성능 저하·적당한 공손). arXiv 2402.14531. 2024.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
  • MIT Technology Review. 아마존 알렉사 ‘매직 워드’ 등 아동 대상 예의 유도 기능. 2018-04.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
  • HISTORY. “Why a 1960s Chatbot Left Its Creator Deeply Unsettled” (엘리자·바이첸바움·엘리자 효과). 2026-07-23 확인. 자료 보기